나이 들어 대학원 공부하니 좋은 점: 교수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이 덤덤하게 나 필요한 만큼 공부하게 된다. 이미 직업적으로 안정되어 있어 앞으로 이 분야에서 자리잡기 위해 교수에게 찍히면 안된다는 부담이 없고, 대학원에서의 학점이 지금 내 커리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아이: 엄마 오늘 집회 있어?
나: (오... 학교에서 배웠나보네) 글쎄?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집회는 늘 있지
아이: 무슨 집회 있어?
나: (페미집회를 말해줄까 검찰개혁집회를 말해줄까 고민) 너는 어떤 집회 말하는데?
아이: 천 원 짜리 같은거 한 장 있나 싶어서
나: (엄마가 멀리 가서 미안)
출근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제정신인 사람들은 상담과 치료로 세상을 버티고 있다. 온전한 몸과 정신으로 살기엔 세상이 엉망이니까. 하지만 비틀리고 균형이 깨진 이들은 저 바깥에서 활개치며 폭력을 재생산한다. 그들은 결코 자기가 저지르는 폭력을 알아차리지 못하며 절대 상담에 오지 않는다.
대학원 단톡방에 난데없이 성적인 게시물이 올라와 사람들이 불쾌해하고, 지적하자 당사자가 조금 후에 글을 올리길 자기도 왜 그렇게 된지 모르겠고 죄송하다며 본인은 종합병원 60대 의사라고 했다. 그러자 단톡방 분위기가 바뀌며 그 사람을 이해하고 다독여주길래 나는 속으로 비웃음.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내 몸을 컨트롤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 알고, 그래서 그것에 실패할 때(거의 필연적으로 실패함) 이제 더 이상 붙잡을 것이 없어지는 그 비참함에 대하서 안다. 몸을 내가 의지로 조절할 수 있다는 환상이 얼마나 스스로를, 그리고 타인을 괴롭히는지.
14살 때 정확히 아빠한테 이런 말 들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을 뿐인데 니가 그림 잘 그리는 줄 아나본데, 그래 남들보다 조금은 잘 그리는 것일 수 있어도 그것 아무것도 아니니까 미대 갈 생각 하지 말라고 하며 퍼부음. 난 미대간다고 하지도 않았고 그냥 그림이 좋아서 좀 더 그리고 싶다고
어떤 날은 뭐든 씩씩하게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가 어떤 날은 아무것도 소용 없을 것처럼 꺼진다. 이럴 때는 응, 너 또 찾아왔구나 하고 우울감을 그냥 맞이한다. 특별히 내가 취약해지는 자극이 있었는지 체크해보고, 생리주기도 체크해본다. 이것도 다른 느낌들처럼 왔다가 또 간다는 걸 믿어.
직접 그린 그림을 프로필로 올려둔 적이 있는데, 미술치료를 하는 지인이 전화가 왔다. 너 괜찮냐고, 그림 보니 위험한 상태인 것 같아서 전화했다고. 짜증이 확 났다. 내가 굉장히 충만한 경험을 한 뒤에 그 감각에 머물며 그린 그림이었고,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프로필에 올려둔 거였는데.
아이에게도 기분이 있고 감정의 맥락이 있고 상황이 있고 바운더리가 있고 관계가 있다. 피곤하고 지친 아이가 길에서 나와 실갱이 중인데 정서의 톤을 살피지도 않고 마구 인사하고 과자내밀고 나와 수다떨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도 커버하고 그들에게도 예의있게 대하려니 피곤했다.
승리 버닝썬 강간 및 검경 유착 및 단톡방.
이거 그냥 대한민국 그 자체잖아. 여기만 이래? 이 단톡방은 구성원만 다를 뿐, 십대 청소년 남자 단톡방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성폭력을 저지르고, 사이버 성폭력으로 그것을 공유하며 다시 강간 문화를 다지며 자라나는 남성들의 현재 그 자체.
가까운 존재에게 무신경해지고 불친절해지는 것을 경계한다. 인간은 너무 쉽게 그런다. 나도 예외 없고. 그런 식으로 함부로 되어서 결국엔 상처를 준다. 더한 건 그렇게 되었다는 현실조차 외면함으로써 이 모든 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결국 꾸역꾸역 밀어가는 거다. 한 쪽에서는 분명 알면서.
그냥 요즘 하는 생각은 하나다. 가장 나다운 것을 살자. 내 고통 앞에 솔���하게 무릎을 꿇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고, 나다움을 배신하지 않는 것. 관계나 상황, 사회적 관습, 책임 등이 이것보다 우선할 때 나는 숨이 막혔고 죽어가는 것 같았다. 댓가를 치르고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름의 친절한 모멸감이었는데, 난 그 소리에 굴하지 않고 결국 무용과를 갔고, 스스로 여러 실패감을 맛본 뒤 학교를 떠났다. 그들의 관점은 한동안 내 안을 파괴하고 휘저었지만 춤과 그림에 대한 호기심과 사랑을 끝까지 파괴하진 못했다. 내가 맛본 즐거움과 실패는 오로지 내 몫이었다.
마흔 넘어 돌아보니 누가 뭐래도 하고 싶은 건 결국 하고, 어떤 건 적당히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하고 하면서 이래저래 뭉툭하게 살았다. 미술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죽을 때까지 그림을 사랑할 것 같고, 그리는 이로서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살 것 같다. 춤은 말해 뭐해. 내 영혼은 언제나 춤추는 영혼.
대단히 잘못된 나라에 살고 있다.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가해자들을 처벌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해도. 그 남자들은 법이 얼마나 우스울까. 암살단을 만들어 하나씩 죽여나가지 않고는 방법이 없어보인다. 무죄. 무혐의. 집행유예. 이런 단어와 연관된 남자들부터 순차적으로 꼼꼼하게 죽여나가야 한다.
@vryjkof
영상 신고했어요. 위협이 느껴진다면 본인을 제일 먼저 보호하시길 바래요. 계정을 닫거나 삭제하셔도 됩니다. 누구도 탓하지 않을 거에요. 이미 큰 일을 하셨어요. 계속해서 다른 계정들도 이 사건이 묻히지 않도록 말할꺼에요. 저도 할께요. 우리 같이 스스로를 지키자구요.
노키즈존 논란에서 아이 '방관'하는 엄마 어쩌고 하는 소리 그만 하자 좀. 어린이들에 대해 무지한 소리. 이보세요 방관은 이런데 쓰지 말고 이 나라 여성들이 죽어나가도록 아무것도 수사하지도 처벌하지도 않는 사법부, 그와 공모한 언론, 여성을 성적대상으로 소비하는 남성집단 전체에게 쓰세요.
결혼을 생각하던 시기는 결혼이 막연했기 때문에 남들이 어려움을 토로해도 나는 잘 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혼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자만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누구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고통의 뿌리는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수업 태도: 강의의 모든 내용을 같은 중요도로 인식하지 않고 대체로 흘려보내고, 평소에 관심 있었던 주제, 내 현재 일과 연관된 주제, 내 분야에서 몰랐던 새로운 정보, 대학원에 왔던 본래의 목표와 관련있는 주제 중심으로 집중함. 잘 할 필요가 없고 배우면 되니까 학생 진짜 편하고 좋다.
책을 읽고, 요리를 하고, 집을 정갈하게 가꾸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아이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몸을 쓰는 일을 충분히 하고, 자주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많이 듣고, 외국어를 배우고, 그리운 친구를 만나고, 강가에 앉아 바람을 맞고, 식물을 키우고, 여행을 가고
일생을 두고 일어나는 사람의 변화를 늘 목격한다. 안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 나한테 없다는 것, 변화의 방향이나 정도나 걸리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냐가 관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에 머물며 지난한 과정을 함께 겪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리) 초등 6학년도 이미 남자 아이들의 왜곡된 성 인식이 심각하다. 내가 올해 중학교 교실에서 겪은 것과 똑같은 일이 이미 초등 교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유치원 단계는 아직 희망이 있어 보이는데, 여기서부터 위기감을 갖고 성교육을 하지 않으면 끝장인 것 같다. 두렵다. 정말로.
교원평가 성희롱은 시스템이 해결해야 한다. 학생들이 개별 로그인 아이디와 비번을 받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응답이 익명 처리 된다고 하더라도 교사가 신고한 응답 건에 대해서는 작성자 조회가 가능하고, 교칙과 법령에 의해 응답한 학생이 처벌받아야 한다고 본다. 이 사실이 평가 전에 공지되고.
오히려 무슨 말이든 꺼낼 수 있는 사이가 서로의 바닥을 보더라도 귀한 사이라고도 생각한다. 이런 관계는 평생에 몇 없으니까. 바닥을 같이 보고 거기서 같이 살아 나오는 힘을 서로 확인할 때 그 관계는 하나의 강을 건너는 것 같다. 설령 어느 순간 관계가 끝나더라도 그 경험은 소중히 남는다.
노키즈존의 어린이 혐오는 어린이의 동반자, 특히 엄마인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와 결합되어 더욱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회는 돌봄노동을 모두 여성에게 몰아넣은 뒤, 다시 그 돌봄의 기능을 빌미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고 있다. 사회는 책임지지 않는다.
사건의 주변인들은 가해 행동을 이런 식으로 미화시키며 그 안에 담긴 가해성을 희석시켜버리고, 심지어 그 해석은 정확하지도 않다. 피해 당사자의 경험을 함부로 지우는 이런 발언은 특히 자라나는 여자아이들에게 매우 해롭다. 여성들은 자기의 피해 경험을 피해라고 규정하는 것도 불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