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순간, 놀랐다. 이건데, 이거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이제야 만났네. 독문학 복수 전공한 사람으로… 아니 이런 해석을 왜 이제야 접하지, 하면서 놀랐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자살한 사람이 많았던 이유, 그렇지… 사랑에 빠진 사람이 많아진 건 아니었지.
올해 읽은 문장 중 “내 육체와 정신은 고단하다.그리고 내 영혼은 평온하다.”라는 문장이 어떤 충격을 주었다. 첫번째 정신이나 영혼이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나는 늘 이분법적 세계관을 고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두번째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삼분법적 세계로의 문이 열려서.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전화가 왔다. 며칠 연체된 책들을 반납한 날이었고 나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라서 전화가 왔을 때 각오를 하고 “네. 죄송해요. 제가 책을 너무 늦게 반납해서 전화를 하신 거죠?”말했는데…사서님 웃음 참으면서 “그게 아니라 도서관 책이 아닌 책 한 권도 같이 반납하셔서.” 😳🫨
글렌 굴드에 심취했던 시절이 있다. 이 시기 나의 마음과 글렌 굴드의 음악과 글렌 굴드에 관한 전기와 글 같은 것들이 한데 모여 굴러다니다가 단편소설이 되었다. 이 글을 블로그에 공개하고 자야지. 2018년에 청년예술지원 최초예술지원 2차 공모에 선정된 소설. 이후에 발표할 데도 없었고 해서.
“삶에 대한 사랑이 무력감을 이기고 다시 깨어나려면 바이오필한 자력이 되살아나야 한다.스스로 생각하고 감정을 빠짐없이 느끼며 창조적으로 활동하는 훈련을 해야만 한다.”(라이너 풍크)
구도자(?)의 기분으로 요즘 읽는,에리히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라이너 풍크는 엮은이.
어제 본 <우리도 사랑일까>의 명대사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최근 본 <소울>은 인생 자체가 틈이어도 된다, 인생 자체가 거대한 틈이다라는 메시지를 주었던 영화 같다. 봄을 예고하는 바람과 빛, 놀이터의 소음 속에서 잘 말려진 빨래를 걷으며 <소울>을 생각했다. 좋은 영화를 보는 건 이다지도 좋다.
어제 내 광기(?)를 부추긴 모리스 블랑쇼의 글.
“철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정말 개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며, 나중에, 훨씬 나중에 깨닫게 되지만 자신을 부수고 끊어내면서까지 이 아름다운 폭력성을 감행했건만 위로 날아 올라가는 일은 영영 요원해진다.”
: 모리스 블랑쇼, 「느린 장례」.
모리스 블랑쇼, 천재구나. 요즘 내가 사로잡혀 있는 건 ‘공허’인데, 책 읽다가 공허에 대한 이런 정의를 만나다니. 공허란 그래서 0의 세계구나, 곱셈이라기보다는 덧셈의 세계구나, 수많은 0으로 트랙을 만들어 돌다가 이 0들을 찢어 괄호로 만든 밤이 블랑쇼의 문장에 기뻐합니다.
덕수궁미술관의 박래현전 정말 좋았다. 40년대, 50년대 작품이 내게는 좋았다. 예술인과 아내, 어머니로서의 자아가 투쟁하였던 화가의 삶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울림과 반향을 주었다, 내 삶에도. (전시 중간, 그림 편지 쓰는 코너에서 잠시 손편지도...)📝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