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통화하면서
나는 일본어도 못하고 디자인도 못하고 일도 못하고 저축도 못하고 다이어트도 못하고 못하기만 한다고 했더니
엄마는 니가 외국가서 외국말로 학교다니고 취직도 해서 외국에서 돈 벌고 있다는게 너무나 대단하고 자랑스럽고 좋다, 그것만으로도 넌 잘하고 있는거라고 했다.
‘아이구 어떡해,장에 가서 그렇게 싱싱한놈을 골라사놓고선 미역천지인 이 나라에 굳이 미역을 갖고 왔네,봄에만 먹을수있는 것을,이젠 일년을 못먹는데 내가 못살아,눈이 어떻게 됐나봐’하고 슬퍼했다. 다음에 먹으면 된다고 위로했는데 일년이 넘었는데도 엄마는 아직도 그 쑥 얘길 한다.어른들 마음
삶이 괴롭고 나자신이 싫어서 딱 서른살되면 죽어야지.그전에 내가 좋아하는 만화 애니 실컷 보고 놀고 죽어야지,하며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던게 5년전이고 학교도 다니고 알바도 하고 취업까지 해서 직장2년차.서른은 이미 넘었는데,죽기를 다짐함 그때보단 많이 행복해진 것 같습니다.
나는 가족이 가르쳐준 정직과 성실을 죽을때까지 믿고 싶다.타인에게 선을 베풀고, 예술과 사랑을 찬미하고, 비록 몇번이고 흙바닥에 구르고 멍투성이가 되더라도 다시 일어나 살고 싶다. 그러나 이는 쉽지않을것이고, 허망함을 견디지못해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리란 절망감도 느꼈다.
일본에 있으면 그 누구도 나에 대해-학력, 직업, 전공, 연봉, 나이, 피부, 체중, 외모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말이 칭찬이면 주워섬기고, 삽소리면 일본어 캔슬링으로 무시할수있다. 그런데 한국에 가면 저 화제들로 나를 뼈째 물어뜯을 사람들로 가득해서 벌써 겁이 난다. 더 스트레스 받
내가 좋은 책을 찾는 동안 가족들은 아파트 매매정보를 찾아다녔다. 사회복지제도를 보고 '남에게 내 돈 퍼준다'고, 성공한 중졸의 자영업자 이야기를 보고 '고학력인 우리가 저사람보다 못버는건 불공평하다'같은 이야기를 가족들이 하는게 속상하고 괴로웠다.우리 사이에 강이 흐르기 시작한것같다.
나는 한국을 벗어났고, 정착한 일본은 나고자란 곳이 아니고 외국인 신분이라 일본이 강요하는 관념으로부터도 논외라서 내 삶의 방향과 지향점을 새로 수정해야했다. 반면 가족들은 계속 한국의 관념에 따라 한국에서의 생존방식으로 살고 있고,이 지점에서 가족과 말이 통하지않아 괴로웠다.
한국선 사람만날때마다 듣고 말하던 연애사업 결혼 연봉 내집 미래같은 사회적 과제의 질문들,그리고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그게 밥먹여주나’는 말들.일본에 오자 들을 일도 말할 일도 뚝 끊어졌다.그래서 해외에 와서 한국의 과제로부터 해방됐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내가 나를 보채고 있더라.
원트윗님 이야기가 너무 공감되어서 인용알티를 쓰게됐습니다.원트윗님이 지금 행복하게 지내시고 계셔서 기쁘고,혹여 지금 괴로움을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이 트윗을 보고 조금이라도 위로를 얻었으면 .. 비록 여전히 쪼렙부스러기같은 인생인 저이지만 랜선타임라인 너머로 응원하고 있읍니다…
에디터 > 편집디자이너
국문학과를 나와서 그저 한국에서 글만 쓰고 읽으며 살줄 알았는데,일본에서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하고 지금은 일본의 출판디자인회사에서 일합니다.어쨌든 저쨌든 책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변화는 없는 것 같지만, 크리에이티브 직종의 세계는 너무나 새롭네요.
는건 나 역시 한국의 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나 자신도 자존감이 건강치 못한 사람이라 '난 지금의 내가 좋아, 나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칭찬보단, 걱정을 가장한 오지랖들이 난무할테고 캔슬링할 수가 없으니 쓴소리도 다 삼켜야할텐데 걱정이다. 그저 1킬
회사와 내가 분리가 되어야 삶이 편안해질텐데, 회사가 내 경제생활과 재류자격까지 쥐고 있으니 영 분리되기가 어렵다. 한국에선 정말 속된말로 "아 다 조까쇼"같은 멘탈로 일했었는데, 일본에선 일할 때마다 속이 먹먹해지고 가끔은 바다 한 가운데에 혼자 둥둥 떠있는 아득한 외로움까지 느껴진다.
왜 여자의 삶에 꼭 결혼과 육아와 남편의 뒷바라지를 욱여넣으려는지 모르겠다.
그래픽디자이너면 회사그만두고 애키우면서 프리랜서도 할수있잖아 같은 말을, 동종업계 사람으로부터든 업계외의 사람으로부터도(가족포함)듣고싶지 않음.
프리랜서 니가 해봤니?
니가 디자이너로 돈 벌어봤니?
나리타 공항에 내려 내 집에 간다. 공항없는 한국의 본가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 고속버스로 3-4시간 달렸던 것에 비하면 간단한 여정이다. 사람이 붐비지 않는 것이 아닌데 조용하다.고요하고,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고,나와 누구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공기는 촉촉하다.
도쿄에 도착했다.
회사에서 너무 졸려서,선배를 꼬셔서 편의점 갔다가 빈 회의실에서 잡담을 했는데,근 20년을 일본서 살고있는 선배가 ‘외국서 외국인노동자로 살다보면, 분명 편안하고 안정되어있는 상태인데도 마음 어딘가 허전하고 흔들리는 그런 이상한 시기가 주기적으로 온다’며,에이타씨가 지금 딱 그 시기라고
회사에서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니 너무 괴롭고 화가 나는 소식이다…
강제로 부서이동당한 부당함도 상사들의 돌려까기식 폭언도 참았지만, 가장 참기 힘들고 괴로웠던건 동기와 후배를 제외한 모든 선배와 상사들이 나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던 일이다. 심하게는 나와 엘리베이터도 같이 타려
투룸매거진 읽은 소감...정말 용기있는 여성분들이 정말 많구나...라는 것.그리고 유럽권에 사시는 분들의 이야기가 많아서, 한국과 거리도 가깝고 문화도 비슷한 일본에 사는 나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 많으셨겠다는 생각을 했다.내가 있는 곳은 적어도 쌀밥에 된장국은 어디가도 먹을 수 있으니..
보수적인 생각일수도 있는데 나는 배우자의 조건으로 ‘살림력’을 가장 중요하게 보더라. 데이트나 섹스는 언젠간 하지 않거나 시시해지는 때가 오지만, 밥먹고 설거지하고 옷 빨아입고 집을 쓸고닦는 살림은 싫고 귀찮아도 평생 죽을때까지 해야할 일이다. 결혼하면 제 몫의 살림을 여자가 해줄거라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잡지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언젠가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일본분들의 이야기도 실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 커다란 세계에 여러 나라가 있지만,닮아서 즐겁고,닮아서 힘든 일본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생활에세이, 음식 소개, 산책풍경부터
일본에서 여섯번째 생일을 보냈다.지난 4번의 생일은 학교 시험이나 아르바이트,과제나 야근(또는 자택요양)으로만 보냈다.작년 생일엔 심적으로 괴로워서 혼자 울면서 보냈었다. 근데 올해의 생일은 하루 24시간 좋아하는 걸로 꽉 채워보냈다.0시에 맞춰 룸메님이 선물을 주셨고,아침 조조영화로 슬램
일본에서 "날이 추워졌구나"를 실감하는 신호들
매미소리가 귀뚜라미소리로 바뀔 때
마른 풀냄새가 날 때
습한 공기가 점점 탁 트여갈 때
백넘버 노래를 거리에서 틀 때
군고구마 트럭 소리를 들을 때
(자매품 : 슈퍼 입구에서 군고구마냄새 날 때)
자판기에 오시루코와 콘소메스프캔이 들어올 때
연애가 너무 오랜만이라 내면에서 적응 기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여름 내내 행복하면서도 한편으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정말 무슨 첫사랑에 빠진 여고생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이게 뭐냐, 싶다가도 뭐든 오랜만에 하면 서툴고 낯설듯이 감정을 다루는 일도 그런 건가보다 하고 납득했다.
감히 트친여러분께 부탁이 있습니다.생일전후로 기분이 널을 뛰고 있어서 하루종일 눈물이 멈추질 않아요…!
멘션으로
1)사랑스런 털동물사진
2)맛있는 음식사진(커피 사진 환영)
3)멋진 풍경(도쿄,서울 환영)
사진 영상을 공유해주실수있을까요?
오늘 저녁만큼은 편안하게 보내고 싶어요
괴로워도 살아야한다. 병원에서 타온 약 한움큼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원고의 진척이 나쁘고, 좋아하는 운동도 쉬어야한다.그래도 식물을 가꾸고, 냉장고에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사다 채우고 건조기에서 갓 나온 포근한 빨래에 얼굴을 부비면서 좁쌀만한 즐거움으로 마음의 구멍을 자꾸 채워야한다.
엄마가 “일본간다 했을때 물론 잡고싶었지만,그때의 너는 떠나는 것 이외엔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같은 모습이었다”라고 했다.
생활비 떨어지면 죽자,할땐알바를구했다.학교그만두고 죽자,할땐 선생님들도움을 받았다.사람은 생각보다 죽기를 쉽게 결심하지만 생각보다 쉽게 죽어지진 않았다.
어쩐지 새해들어서 ‘일본엔 어떤 계기로/왜 왔는지’를 이야기할 때가 많은데 이젠 기억이 잘 안 난다.대단한 야망을 갖고온 절대아녔고,늦은 꿈(미술)을 이루려는것도 아녔고,그냥 한국이 너무 싫었고 죽기전에 한국을 한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분명 당시에 일본을 고른 이유는 많았을테지만
하지 않았고,점점 후배들도 날 무시하기 시작했다.인사조차 받아주지 않는사람들인데,상담도 항의도 할 수 없었다. 급속도로 사람이 위축되고,잘 하던것도 못하고,그렇게 그림자같이 살며 매일 울었다. 참…돌아보면 2년을 어떻게 다녔나 싶고.
인간관계의 기본도 안 지키는 것들. 꼭 벌받아라.
저임금과 고세율에 시달리며,일본어가 능숙치않다고 기죽고,외국인차별에 속상할때도 있다.세상 어디든 삶은 녹록치 않고,한국이 그리울 때도 있고,뛰쳐나온걸 후회한 순간도 있다.다만 5년전의 내가 정말로 살기를 멈췄다면,이 희로애락조차 모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을 생각하면,기분이 묘합니다.
이 영상 보고 저 칫솔샀다.(일본에선 '첨단칫솔'로 검색, 로프트나 큰 드럭스토어에 있다.)일반칫솔로 먼저 닦고나서 물조금 묻혀서 첨단칫솔로 이 뒷면과 뿌리쪽 어금니 양옆을 닦는데 정말정말 시원하다.물론 입을계속벌리고있으니 침흘리게되는거랑 때때로 피도 나는데 스케일링만큼 시원하다
중국인친구와 일본에서 집을 구매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친구는 일본도 싫어서 제3국으로 떠나려고 영어공부중이라극구 반대의견이었다.일본에 집을 사서 정착한다해도 지진도 무섭고,집의 가치도 갈수록 떨어질텐데…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정말 이건 생각해봐야’라고 느꼈던 이야기는
이제 고작 세번 나갔지만 자랑할래요
10년만에 검도 다시 시작했다는 이야기
그것도 일본에서…
10년간 10킬로 넘게 찌고 체력도 망해서 포카리캔들고 눈물을 흘리는 정대만이 된 기분이지만, 2단은 일본에서 따는 것도 멋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오래 하고 싶어요.
새벽에 오한와 경련 때문에 정말 지옥같은 시간을 보냈다.지독한 가위에 눌린게 아닐까 싶을만큼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가빠진 숨을 고르려고해도 고통은 더 몸을 조여와 팔다리를 펼 수없었다.들숨과 날숨마다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백신이 이정도면,정말 투병했던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걸까
기대하는 사람은 당연히 아웃. 살림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에게 정말 호감가더라.번거로운줄 알면서도 젓가락받침과 반찬접시를 내어 상차리는게 즐거운 사람, 주말아침에 나랑 음악틀어놓고 엉덩이춤추면서 청소하는 사람이 이상형….
…써놓고 나니 내가 너무 청소 광인인가 싶기도 하고…
외국인 입장에서 "일본어 잘한다"고 들으면 찝찝하지만, '진짜 일본어 잘한다 난 한국서 6년 살아도 네가 일본어로 말하는만큼 한국어 못할거야'라는 후술을 들으면, 날 평가하는 말이 아니라 놀랍고 부러워서 하는 칭찬이구나 싶어서 그냥 「頑張ったんだよ!(どや)」하기로 했다.
유학생 때 편의점 알바 마치고 집가서 과제하고 4시간 자고 1시간 걸려서 학교다니고 그랬던 시간을 잊을 순 없어.티포인트 겨우 쌓인걸로 100엔짜리 커다랗고 맛없는 빵사서 끼니를 때우고, 돈을 제때 못내서 인터넷이랑 핸드폰도 한번씩 끊긴 적이 있다.지금도 쥐꼬리 월급이긴 하지만 그때에 비하면
옆모습이 너무 벙벙해서, 살을 더 빼면 입어야지 하고 방치했던 원피스를 어제 입었는데 시원하고 편하고 팔랑팔랑 천도 가벼워서 그냥 열심히 입으려고. 옷입고 친구만나러갔는데 친구가 "진짜 잘어울려! 이직하더니 완전 예뻐졌네 ~!"라고 너스레를 떨어줘서 앞으로 이런 옷 많이 사서 막 입을거다.
한국에서 실수했을때 “너는 귀가 안들리는거같으니 내일 연차써줄게 병원다녀와라”소리 듣고도 눈 하나 깜짝 안했는데 일본에선 그냥 이거 글자 고쳐달라 같은 작은 실수만 지적받아도 눈물이 막 펑펑 날라그런다. 이 실수들이 ���이고 회사를 다닐 수 없게되고 일본에서 더 살수 없게 되어 강제귀국하
우당탕탕 정신없는 하루긴 했지만 그간 벼르고 기다리던 물건을 사서 기쁘다. 무려 1.2리터 들어가는 전설의 스탠리텀블러…미국 엠지 아이템이라던데 가격이 사악해서 못사고 있다가 드디어 샀다. 물마시는 나에게 정말 이만한게 없다. 벌써 한 컵 마셨고,지금 두 컵 째도 거의 다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