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들었던 에피소드. 초면인 사람이 "결혼하셨어요?" 해서 "이혼했는데요" 하고 대답했더니 민망하고 미안해하더라고.그래서 그분이 말씀하셨단다."그러게 왜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을 하세요?" 질문의 질이 삶의 질, 관계의 질을 결정한다는 걸 알겠다. 시간이 가고 경험치가 쌓일수록 더더욱 실감나.
부암동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키우던 오뎅이도 그렇게 죽었다. 내 밤산책메이트였고, 술취한 나를 길에서 만나면 걱정스레 집까지 데려다주고, 자기 친구들과 다니다 만나면 날 친구들에게 소개해주던 녀석이었다. 여러 집에서 오뎅이를 위해 밥그릇을 집 앞에 두곤 했는데...오뎅아.
집에 불이 났을 때, 나는 고양이 두 마리를 집에 둔 채로 구출됐다. 그중 한 마리와는 눈이 마주쳤지만 현관문부터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현관을 열자 휘몰아쳐 들어오는 검은 연기에 질식해 소방관이 산소호흡기 끼우고 구출. 밖에서 미친 여자처럼 서성거리며 애들 구출되기만 기다렸다.
내게 “엇 박사다. 잡아라!”고 댓글단 이는 내 문제제기에도 “아 재미지네” 하길래 차단했다. 96년부터 알던 사이였다. 또 한 분은 나를 “곧 이름과 정보가 공개되실 분”이라 칭했다. 나중에 사과하셨지만, 너무 속상해서 울었다. 내상이 회복되지 않는다. 웃겨요? 웃겨요? 이게 웃기냐고!
좋은 질문하기는 좋은 대답을 하는 법 이상으로 중요한데 우리 문화는 그 부분을 잘 가르쳐주지 못한 편이다. 오랫동안 질문을 격려하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그 후로도 자신감을 갖고 질문하는 일을 무엇이나 질문해도 된다는 것과 혼동하는 사례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철학교육은 질문교육이기도 하다.
둘중 하나라도 잃었다면 나는 얼마나 오래 죄책감에 시달리며 괴로워했을까...몇시간 뒤 소방관이 안아서 데려다준 스밀라가 겁먹은 채 내품에 파고들던 때가 잊히지 않는다. 집에 불이 났을때, 심지어 자다 깼을 때 명철한 판단을 하기란 쉽지 않다. 진짜 쉽지 않다... (엉엉)
양성평등교육을 위한 [질문공 굴리기] 토크행사 준비 중. 철학을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선생님은 답보다 중요한 게 질문이라며 좋은 질문을 하는 것이 철학의 시작임을 역설했다. 내 질문을 가다듬고 질문을 받을 준비를 한다. 좋은 질문이야말로 공굴리기, 아니 눈덩이 굴리기의 시작임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