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솔직히 6,70대의 보수주의보다도 20대(특히 남성)의 보수화가 더 무섭다. 노년층의 보수주의가 기낏해봐야 ‘어려운 사람이 여기도 이렇게 많은데 왜 북에 퍼주냐’ 정도라면, 젊은 층의 보수주의는 ‘약자는 보상을 받으므로 이미 기득권’이라는 전제 하에 약자에게 공격본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독일은 ‘우리는 가스실에서 6백만을 살해하지 않았다. 유태인들의 과장이다. 3백만 정도에 불과했다’고 항의하지 않는다. 어떤 식민지 가해국가도 숫자 부풀렸다고 피해국에 항의하지 않는다. 3.1절 행사에 언급된 희생자 수치가 너무 많다고 항의하는 일본은 최소한의 염치도 없는건가.
사실 송가인은 기념비적 사건이다. 더 이상 1020뿐만 아니라(실질적 경제권력을 쥔,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소외를 겪는) 5060이 새로운 대중문화의 소비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즉 5060이 대중문화 소비를 위해 지갑을 꺼내도록 만든, 덤으로 60대 어르신들을 페미니즘에 동조하게 만든 사건.
나는 '90년생 김지훈'이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치열했던 과거와 불안정한 현재와 희망 없는 미래. 그런데 그는 왜 자신의 분노를 국가와 체제가 아닌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증오와 원한으로 쏟아내는가. 한국 사회의 미래는 이 질문에 달려있는 것 같다.
한국인들은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까. 왜 모든 스포츠가 전쟁이고, 매 경기가 산왕전이고, 학생들은 매일 학원전쟁, 직장인은 출근전쟁, 모든 삶을 전쟁치르듯 하면서 살까(그러나 왜 계급전쟁은 하지 않을까). 왜 이렇게까지 부서져가며 악착같이 사는 걸까. 축구 보면서 이 생각이 들었다.
많은 이들이 집게손가락 모양에 분노하는 사이, 그들의 삶에서 무엇이 나아진 걸까? 왜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자본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강제로 군복무를 시킨 국가에 대해서는, 청년의 삶을 망가뜨렸던 기성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으면서, 고작 손가락 모양에 모든 분노를 집중하는가.
아내에게 쓴 차명진씨의 페북 편지에서 "이렇게 좌충우돌, 물가에 어린 애 같은 서방 데리고 살려니 마음고생 많지" 라는 표현을 보고 피식했다. 아직도 자신을 ‘물가에 있는 어린 애’로 규정하고, ‘엄마같은 아내’가 손수 케어해주길 바라는, ‘철부지 소년’으로 자길 포장하는 중년남성의 클리셰.
적어도 지역의 국립대는 국가가 책임지고 명문대로 만들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괴팅엔이 무슨 인구 백만 도시인 줄 아나? 소도시의 대학들을 국가가 발전시켜 주는거지. 지역 거점대들이 서울 하위권 사립대보다 수험생들에게 외면받는 현실에 국가는 책임을 못 느끼나?
대통령의 정체성. 서울 출생, 서울대 졸업, 금수저 출신, 전직 검찰총장, 강남 거주, 젠더는 이성애자 남성. 그의 인격을 이루는 정체성 중에 비주류는 단 하나도 없다. 그야말로 주류 중의 주류, 무결격의 주류 정체성. 현시점 대중들의 욕망이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GS 손가락 논란과 안산 숏컷 논란을 일으킨 남초사이트에서 저격한 여성 BJ가 죽었고, 그녀를 비난한 안티페미 남성들이 지지하는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이다. 여학생들은 계속해서 남성들에게 ‘위문’편지를 쓸 것이고,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일체의 주장들은 ‘남성혐오’로 치부되는 세상이 와버렸다.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옷차림을 비난하는 데에는 '일베'와 '딴지일보'가 한 목소리였다.
"소개팅 나가냐", "다음엔 더 야하게 입고 나와라", "탬버린 손에 걸치고 옵빠 한번 외쳐라", "미투 낚시질 한다", "도우미 아닌가".
이게 일베와 딴지일보가 공통적으로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나는 줄곧 문재인정부의 우경화와 개혁후퇴를 비판해왔지만, 이번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76만 명의 국민청원과 야당의 혐오선동에도 굴하지 않고 중국인 입국금지를 실행하지 않고, 시종일관 국내 방역체계 구축을 위해 분투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정부는 최선을 다 했다.
기시감. 2012년 유학 중에 잠깐 한국에 들어왔을 때 마침 대선이 있었다. 박근혜의 당선이 유력하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 지하철에서 의기양양해 하던 어르신들의 표정이 기억난다. 그리고 최근 이준석의 당대표 취임에 기세가 등등해진 주변 남학생들을 자주 목격한다. 양자는 몹시 닮아 있다.
‘어째서 외국의 좋은 책들이 번역되지 않는 겁니까?’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이렇게 질문하는 분들은 ‘도대체 인문학자들은 뭐하냐’ 하고 따지고 싶은 것. 보통은 ‘저도 답답해요’라고 웃으며 답하지만, 한번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예컨대 어느 작은 출판사에서 판권을 사와서 번역한 책이 출간된다.
얼마 전까지 '4차 산업혁명' 담론이 인기더니 이제 '포스트 코로나'가 대세인 것 같다. 언제나 그러했듯, 또 다른 담론의 과잉이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대로 진입했다는 가상을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사이, '낡은' 사회적 모순들은 여전히 존속된다. '새로움'의 가상, 그러나 '익숙한' 자본주의.
북반구 선진국들이 백신을 독점하고 부스터샷까지 맞아가며 '위드 코로나' 축제를 벌이는 동안, 아프리카는 여전히 10% 미만의 백신접종률을 보이고 있다. 오미크론은 선진국 백신 독점의 귀결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을 포함한 북반구 국가들은 다시 아프리카 봉쇄를 내리고 있다. 이게 옳은 일일까.
소위 '20대 남성'들. 한명 한명 대화해보면 착하고 좋은 친구들인데, 어쩌면 그렇게 차별 내지 PC 쟁점에 대해서 분노를 드러내는지. 오늘 작문과제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 책을 조롱조로 맹비난하는 한 학생의 글을 보고 '어쩜 이렇게 배우려는 자세가 없느냐'고 야단을 쳤는데 마음에 걸린다.
솔직히. 삼성반도체 피해자들과 유가족이 그렇게 힘겹게 싸울 때도, 지금 삼성해고자 김용희씨의 농성에도 아무 관심도 없고 갤럭시 핸드폰, 에어컨 등 아무 죄책감도 없이 잘만 쓰던 사람들이 고작 아사히 맥주 안 사마시는 걸로 정의감, 도덕적 우월감에 젖어서 남에게 호통치는 모습. 보기싫다.
재벌 3세가 탈세하고 주가 조작하고 경영 물려받는 건 한국경제의 앞날을 위해 봐주자면서,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면 ‘로또취업’이라며 방지법을 만들겠단다. 부유층의 재산상속과 부동산 투기로 인한 재산증식은 당연한 거지만, 비정규직 연봉이 오르면 ‘알바가 서울대 취급받는다’며 분개한다.
조국 교수에 대한 내 감정은 복잡하다. 한편으론 색깔론이 안 먹히니 온 가족의 사생활을 낱낱이 폭로해 사기꾼으로 모는 보수야당의 파렴치함 앞에서 그에 대한 인간적 연민이, 다른 한편으론 딸의 온갖 특혜에서 드러나는 한 ‘부르주아 계급’ 지식인의 위선에 대한 실망감이. 가슴이 먹먹하다.
사실 질병을 차단할 목적이라면 ‘중국인’입국을 막을 게 아니라 ‘중국에 최근 체류한 모든 사람’ 입국을 금지해야 할텐데, 그럼 중국인 뿐만 아니라 한국인이나 미국인, 일본인 등도 포함대상이 될 것. 그런데 아무도 이렇게 주장하지 않고 단지 ‘중국인’ 입국만 금지하자고 하는 게 바로 인종차별.
약소국의 민족주의는 대개 강대국에 대한 저항의식 속에 생겨난다. 우크라이나 민족이 독자적 역사가 있는지 아니면 근대 들어 볼셰비키의 우크라이나 ‘민족화’의 발명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그들이 스스로 하나의 억압받는 민족으로 느끼고,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
이태원에서 159명이 죽었다. 장관은 책임지지 않았고, 국회의 탄핵은 기각되어 임기를 유지했다. 오송역에서 14명이 죽었다. 도지사와 시장 등은 빼고 말단 경찰과 공무원들이 형사입건 되었다. 해병대 병사가 구조작업 중에 죽었다. 국방부는 수사단에 대대장 이하급만 책임을 물라고 지시했다.
독일 뉴스를 더 이상 봐줄 수 없다. 정계는 물론 시민단체들 조차 '유태인의 고통'만을 말할 뿐,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전달하지 않고 그레타 툰베리에 대해서도 바로 환경단체 활동가의 입을 통해 비난한다.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말하면 '유태인의 고통을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 지겨운 논리들.
‘내가 힘드니까 여자들은 페미니즘하지 말고 나부터 위로해라.’ 이게 논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일단은 가르쳐야지, 달리 방법이 있을까? 그런 맥락에서 민주시민교육이 필요하고, ‘나를 가르치려 들지 마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사회가 거부할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파트 가격이 폭등했다고 비판하던 사람들이 지방선거가 되면 해당 지역 집값을 올려주겠다고 공약하고, 상대방 후보 정책이 실현되면 집값이 폭락한다고 비판한다. 집값이 올라도, 떨어져도 모두 정치적 공격의 명분이 된다. 수준낮은 정치가 지배하는 곳에서 '집값'이 모든 민주적 가치를 대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