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세자빈의 예복은 왕비의 붉은 적의와 달리 흑단으로 만들어진 아청색 적의였습니다. 제작 여건 혹은 기록 오독의 문제로 대한제국의 푸른 적의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과 대한제국의 적의는 완전히 다른 복식이며, 영화 <사도>에서는 세자빈의 적의가 올바른 형태로 표현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은 한국에 대한 사랑이 느껴져서 좋아합니다. 비슷한 시기 폴 자쿨레의 작품(왼쪽)이 동양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집중했다면, 엘리자베스 키스의 작품(오른쪽)은 부귀와 행복을 상징하는 병풍과 대비되는 새신부의 긴장과 쓸쓸함이 한국 특유의 차분한 미학으로 표현되었습다.
오 헨리의 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주인공 델라는 남편 짐을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시계줄을 선물합니다. 델라를 위한 "머리빗"을 사온 짐은 델라의 머리를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머리카락이 짧다고 해서 빗이 필요 없는 것도 아닌데 남편은 왜 당황한 것일까요?
해당 문양 배치는 고쇼도키(御所解)의 일종으로 보이네요.
1850년대 이후 일본의 서구화로 상류층 가문은 우치카게 등 각종 옛날 기모노를 내다 팔기도 하였는데, 여행자들이 구입한 기모노를 유럽에서는 재봉을 모두 뜯어서 드레스, 특히 실내복으로 개조하였습니다. 해당 사진은 일반 드레스이지만,
20세기부터 여성 한복의 저고리는 허리 근처까지 길게 내려오게 됩니다. 신 문물의 유입과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로 인해, 여성복 또한 제약에서 벗어나 편안하고 활동적인 옷차림이 유행하였던 특징입니다. 1920년대에 가장 길었고, 1950~60년대를 지나면서 다시 짧아지기는 하였어요😊
외제니 황후는 코르셋과 크리놀린을 널리 유행시켰지만 이로 인해 여성들의 사고발생이 높아지자 크리놀린 퇴출 운동을 지지했으며, 루이비통 등 명품과 사치로 인해 비판을 받았으나 조르주 상드와 같은 여성 인재들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여권 신장을 응원했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복잡합니다.
여기서 "머리빗"이란 오 헨리가 살았던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유행한, 여성이 긴 머리카락을 틀어 올렸을 때 비녀처럼 꽂아서 고정 시키는 역할을 했던 장식빗을 말합니다. 오 헨리는 짐이 사온 머리빗이 대모갑으로 만들고 보석 테두리를 장식한 매우 값비싼 장신구라고 묘사합니다.
흔히 조선 시대극에서 자주 보이는 오류는 흉배가 붙은 단령포인 상복(常服)의 색을 빨강, 파랑, 초록 등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임진왜란 이후 신하들의 상복 색상은 벼슬이나 품계에 상관 없이 모두 검푸른색으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아래와 같은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이 맞습니다.
18세기 후반 풍속도에는 수평으로 두 개의 쪽을 이어붙인 독특한 머리 모양이 발견됩니다. 생머리(=새앙머리=사양머리)를 응용한 벌생머리(=벌사양머리)의 묘사에 가장 가깝습니다. 벌생머리는 생머리처럼 양갈래로 땋는데, 두 개의 쪽을 만들고 비녀를 꽂아 고정하는 방식입니다.
벽제는 당상관급 관리들 뿐만 아니라 공주·옹주들도 행하였던 기록이 있습니다. 백성들을 위해서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는 이야기의 출처는 잘 모르지만, 그런 배려가 충분히 있었을 것도 같아요. 예로부터 왕족들은 피휘하기 힘들지 않도록 일부러 괴상한 벽자(僻字)로 이름을 짓는 풍습이 있었으며…
활옷은 조선시대 왕녀들과 외명부 1품 부인들의 예복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분에 관계 없이 민가 여성들은 평생에 단 한 번, 시집가는 날 궁중복식인 활옷을 입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이를 '섭성'이라 합니다. 전문적으로 활옷을 빌려주는 세물전을 통해 웨딩드레스 대여가 가능했던 것이죠.
본래 제비부리댕기를 맬 때는 땋은 머리카락에 댕기를 댄 뒤 고리를 만들고, 머리카락과 함께 조금 더 땋아서 마지막에 매듭지어 줍니다. 이 때문에 댕기의 고리가 머리카락 끝이 아닌 중간에서 걸리게 되었습니다.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이러한 전통 댕기 묶기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조선 전기 시대극 중에서 가장 복식 고증의 호평을 받은 것은 <대왕세종>입니다. 화려한 장저고리, 크게 틀어올린 가체, 펑퍼짐한 단삼, 장삼, 배자 등은 <용의 눈물>의 복식을 많이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첨언하자면 관료들의 단령포 색상이 좀 더 다양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복식을 배운다는 것은 아주 좋은 정보탐색의 기반이 됩니다. 헉 예쁘다 그런데 누군지 모르겠다 싶을 때 옷차림만 보고도 1600년대 중후반 스페인/포르투갈 혹은 그 식민지 출신의 소녀로군 하고 단번에 범위를 좁힐 수 있답니다 (삽화는 스페인계 멕시코 작가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 1647~1695)
옷깃의 깃머리를 꺾어 굴린 모양은 단령포를 상징하여 "관딧(관대)깃"이라고 했다네요. 어린 남자아이 저고리에서 보이는 형태로, 커서 양반이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한복은 정말 배우면 배울 수록 새로운 게 많이 보이는…^^
사진 자료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조선 전기의 한복은 저고리가 허리선 아래로 내려올 정도로 넉넉한 길이이며, 목판깃의 모양이 많이 사용되었고, 깃과 무 부분 뿐만 아니라 앞길의 섶까지 다른 색으로 장식하기도 하였습니다. 드라마 <인수대비>등 다양한 조선 전기 사극에서 이러한 저고리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 러시아에서 촬영된 고려인의 모습입니다. 근대식 한복으로 바뀌어가던 한반도와 달리, 전체적으로 1800년대 모습이 많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얹은 머리를 하였으며 저고리가 매우 짧고, 아래로 넓은 치마말기가 보입니다. 다만 치마 폭이 좁기 때문에 실루엣은 일직선에 가깝습니다.
2015/2016 샤넬 크루즈 컬렉션
샤넬을 상징하는 트위드 재킷 & 한국 전통의 색동과 조각보 패턴 & 저고리의 둥근 어깨선 & 한복 치마의 하이 웨이스트 항아리 실루엣 & 버선과 고무신을 연상시키는 가죽양말과 메리제인 슈즈 & 모든 모델의 머리 모양은 전통 가체 모양을 적용
너울은 고려시대부터 발전하여 조선 전중기 사용한 머리쓰개로, 전모형 모자 위에 얇은 검은색 비단을 하늘하늘하게 늘어뜨린 형태입니다. 영상매체에서는 화려한 색으로 꾸미거나 배우의 얼굴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지만, 사극 <용의 눈물>에서는 이러한 검은 너울의 착용을 잘 고증하고 있습니다.
시텐노지"왔소"(四天王寺ワッソ)는 야요이 시대~고훈 시대 도읍지였던 오사카 나니와궁 유적지에서 개최하는 가을 축제로,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 교류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퍼레이드가 펼쳐집니다. 아스카 시대 고구려~백제 파트 고증이 아주 훌륭하고 멋지네요!
사진 출저 : ECC사회공헌·국제교류센터
"대모갑"은 대모거북, 즉 매부리바다거북에서 채취하는 거북 껍질입니다. 대리석처럼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무늬에, 가벼우면서도 단단하고 가공이 쉬운 최고급 공예 재료였습니다. 이 "대모갑 머리빗" 유행의 근원에는 30년 가량 서양에서 유행하였던 자포니즘, 즉 일본 문화 열풍이 있었습니다.
만화 <프린세스>는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 복식을 적절히 혼합하여 복식을 디자인합니다. 라미라의 여성 복식은 이탈리아-스페인-독일 등 중남부가 모델로, 하이 웨이스트 라인의 풍성한 드레스와 치렁치렁한 소매, 길게 늘어뜨리는 머리카락과 쿠션처럼 동글게 만 카필리아라 등이 주로 사용됩니다.
2011년작 <제인 에어>는 낭만주의 여성 드레스의 형태를 잘 고증해 낸 작품입니다. 1830년대 전반까지 정수리를 높게 장식하던 머리 모양, 커다랗게 부푼 소매는 18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며 머리는 양 옆에서 늘어뜨리고, 소매는 날씬해지며 점차 X자형 드레스에서 A자형 드레스로 유행이 흘러갔습니다.
몽두리라고 하는 예복입니다. 기생이나 무희 등 신분 낮은 여성의 옷으로 사용되었으며, 노란색이 가장 많이 쓰여 황초삼 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세부적인 형태는 다양한데 (여령무의 반소매, 춘앵무의 긴소매 등), 팔에 수놓은 네모난 자수 장식의 이름은 특별히 전해지지 않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소장 중인 <연꽃 화병 곁에 앉은 여인 Seated Woman by a Vase of Lotus> 입니다. 박물관에 어세션된 해는 1932년. 그래서 인지 18~19세기 조선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만, 국내 학계에서는 치마저고리의 형태 상 고려 후기 여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1919년 오사카아사히신문에는 3·1운동 당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現 경기여고) 여학생들의 만세 시위 사진이 실렸습니다. 당시 10대 후반이나 20대 젊은 여성들은 앞머리를 볼록하게 부풀린 얹은머리를 좋아했는데요, 보통 챙머리, 영어로는 퐁파두르, 일본어로는 히사시가미라고 불렀습니다.
1000원짜리 지폐 속 퇴계 이황은 머리에 뾰족한 복건을 쓰고 있습니다. 사실 이황은 중들이 쓸 법한 복건은 선비의 차림새로 점잖치 못하다고 여기며, 심의 차림에서도 한벌로 여겨지는 복건을 쓰지 않고 정자관을 썼다고 합니다. 정자관은 5000원짜리 지폐 속 율곡 이이가 쓰고 있는 모자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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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열사, 1574~1593)
1500년대(16세기) 저고리는 품이 넓고 넉넉하며, 넓고 네모난 목판깃이 특징입니다. 넓은 소매 아래로 다섯 쌍의 옥가락지를 낀 손가락이 보이며, 머리모양은 변수묘 출토 목우상을 참고하였습니다.
본래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 문화에서는 오른쪽 여밈(우임)과 왼쪽 여밈(좌임)이 모두 나타났으며, 한국의 경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오른쪽 여밈이 완전히 자리잡게 됩니다. 숙명여자대학교에서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귀부인의 저고리를 왼쪽 여밈으로 해석하여 재현하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비엣남 의상은 아오녓빈일 것 같네요. 한자로 표기할 때는 日平衣라고 하지만, 비엣남의 단어는 수식이 명사의 뒤로 가기 때문에 아오(Áo,衣) 녓(Nhật,日) 빈(Bình, 平)이 됩니다. 아오녓빈, 통칭 녓빈은 18~19세기에 착용되었다는 점, 상류층 여성들의 예복이라는 점,
중요민속문화재 63호 녹원삼은 당시 "왕비녹원삼"으로 명명하였으나, 옷의 크기나 문양 등 품격을 고려하면 왕비 이하의 명부에서 착용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문화를 다루면서 단순히 이전 기록을 답습하는 것이 아닌, 언제나 꾸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8세기 경 중국 당나라의 슈비(Shubi, 梳篦) 문화와 대모갑 공예를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독자적인 벳코(鼈甲) 공예가 발전하였고, 나가사키 항을 중심으로 대모갑으로 만든 칸자시(簪)나 코가이(笄), 쿠시(櫛)와 같은 일본 공예품을 근대 서양에 수출하게 되었습니다.
아기포대기라는 뜻으로도 알려져 있는 처네는 조선 후기 서민 여성들의 방한용 머리쓰개 중 하나입니다. 머리 위에 두르는 깃 부분에서 뾰족한 주름이 잡히는 것이 특징이며, 주로 홍색과 녹색으로 만들지만 색상이 엄격히 정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보통은 하얀 동정이 달려 있는 것이 많습니다.
삼국시대 복식 자료에서 자주 보이는 이 그림은, 독립운동가이자 화가, 복식전문가이신 이여성 선생님의 저서 <조선복식고>에 수록된 삽화입니다. 지금은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 자료에 수정하고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점이 알려졌지만, 저는 <조선복식고>의 고증오류나 한계보다는
<무인시대>는 개인적으로 가장 고려풍 복식을 잘 표현한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송나라 관복제도와 고려 특유의 화려한 황금 장식을 기반으로 주름장식, 반비, 왼쪽-오른쪽여밈, 저고리를 치마 안쪽으로 넣는 방식과 바깥쪽으로 빼는 방식 등 다채로운 고려 복식을 풍부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복식에서도 진화에 따른 흔적기관이 나타납니다. 저는 이 "흔적"들을 정말 좋아해요. 로코코 시대 만투아(Mantua) 드레스 엉덩이에 붙어있는 정체불명의 네모난 널빤지 같은 장식(우)은 본래 바로크 후기의 편하고 헐렁한 만투아 드레스의 남은 옷자락을 엉덩이 뒤에 모아 묶었던(좌) 흔적입니다.
"후궁의 첩지를 내린다"라고 할 때의 첩지는 帖紙, 牒紙, 牒旨 등으로 표기합니다. 이는 신하나 부인들을 봉작할 때 왕명을 적은 작은 교지를 말합니다. 첩지(疊紙)는 화관이나 족두리를 쓰기 위한 밑판이라는 뜻입니다. 쪽진머리를 만들고 가르마에 얹어 위에 족두리를 고정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영화 <튤립 피버>는 17세기 초 급격한 패션의 변화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르네상스풍 거대한 러프와 몸을 빈틈없이 싸매는 형식이 여전히 이어짐과 동시에, 넓게 드러낸 데콜테와 풍성하고 편안한 소매로 이루어진 바로크 전기 양식의 드레스가 네덜란드 시민들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한복 상점을 가지 못하는 대신 😭 집에서 전통 무용을 감상했습니다~. 국가무형문화재 동래야류(왼쪽)는 부산 동래구의 탈춤이며, 야류별곡(오른쪽)은 이 동래야류를 새롭게 재해석한 창작 무용입니다. 동래야류·야류별곡 中 '할미과장'에는 영감과 할미, 그리고 영감의 첩인 제대각시가 등장합니다.
아래의 백제 왕과 왕비의 모습은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에서 다수의 작가가 협동 제작한 재현 일러스트입니다. 가장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백제 복식이며 국립민속박물관 전시물을 참고해 복원하였고, 서울 및 공주시, 부여시 등의 백제문화 관련 산업에서도 많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세계여성의날
#InternationalWomensDay
#IWD
#가장앞선여성들
1800년대(19세기) 중반, 근대 페미니즘의 첫 물결인 빅토리안 복장 개혁 운동(Victorian dress reform movement)이 일어났습니다. 당시는 커다란 새장 모양으로 드레스를 부풀리는 '크리놀린'이라는 보형 속옷이 유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조선 이전 시대극 중에서 가장 복식 고증의 호평을 받은 것은 아마 <근초고왕>일 것입니다. <근초고왕>의 백제 관모는 실제 기록상에 남아있는 고깔형 절풍 머리쓰개와 장식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첨언하자면 시기상으로 절풍의 모체 부분까지 금속제인 한반도 전통 금동관모가 사용되면 더 좋습니다.
조선 시대극에서는 물을 긷는 하녀인 무수리가 자주 등장합니다. 무수리의 옷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은 드라마 <장희빈>의 최무수리 캐릭터입니다. 무수리들은 채도가 낮은 푸른색으로 물들인 밋밋한 무명옷을 입었는데, 마치 데님과 같은 튼튼한 작업복 역할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테니스, 크리켓, 체조, 경마까지. 여전히 치렁치렁한 드레스의 느낌은 남아있지만 여성 복식은 점차 자유를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싶은 여성들이 개발한 갈래치마(Bifurcated Skirt)를 보실래요? 단추를 투둑 풀어내면 짠~ 바지가 됩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냈을까요?
흔히 조선시대 대궐에서 물 떠다 주는 계집종 으로 알려진 <무수리🧺🫧>는 몽골어 <БҮСГҮЙ>에서 왔다고 합니다. 한자로는 <水賜伊>라고 쓰고, 계축일기에 따르면 <므(믈, 물의 옛말)스리> 라고 발음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여기서 몽골어로 <БҮСГҮЙ, 부스귀>는 '소녀, 여자'를 의미합니다. 이는
1981년 <여인열전>에서 표현한 대수머리는 지금의 시각으로 본다면 다소 조잡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머리통을 감싸는 가체인 위체 부분입니다. 요즘은 흔히 모자처럼 간단하게 머리를 덮는 반구형으로 표현하지만, 이 시기에는 땋은 머리를 돌돌 감아올리는 방법이 사용되었는데요,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의 유물은 19세기 조선의 복식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아주 귀한 문화재입니다. 국가 지정 최초 중요민속문화재 제1호인 자적당의를 포함하여 제211호 덕온공주 의복 6점, 제212호 덕온공주 유물 33점 등이 단국대학교 석주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고려 말 비빈들의 예복은 노국공주 초상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송나라풍으로, 원 간섭기 이전 고려 초중기에도 비슷하게 착용하였을 것입니다. 허리치마와 폐슬, 결대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완전한 중국풍 답습이 아닌 주름 장식 등에서 한국식 현지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떠구지'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머리틀의 정식 명칭은 목제큰머리(=어여미)입니다. 본래 가발인 가체를 이용해서 만들었던 방식이 가체금지령과 함께 목제로 바뀐 것으로, 여기서 '떠구지'는 '떠꽂이', 즉 큰머리를 '떠받치는 꽂이'인 기다란 검정색 비녀 두 개를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