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맞다'라는 생각과 관련해 한국인 특유의 약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세상 모든 문제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정답이 딱 하나만 있다는 경직된 사고.
이 부분과 관련해 한국인은 딱히 과잉된 자기애 없이도 나르시시즘과 일부 유사한 세계관에 근거해 타인을 공격하기 쉽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많은 설명이 있지만 박지선 교수님의 한 줄 설명에 무릎을 쳤음. "나르시시즘은 '내가 맞다.'를 넘어 '나만 맞다.'고 생각하는 것." 저 말에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인 웅대한 자기상, 병리적 자기애(특권의식+착취성), 자기 능력에 대한 과대 망상이 담겨 있음.
가부장제에 길들여진 나이 든 아주머니들은 결혼지옥과 같은 상황을 볼 때 남자가 잘못을 했음에도 여자 쪽만 욕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를 물으면 십중팔구 이렇게 답한다. "남자가 잘못한 거 누가 몰라? 하지만 남자는 안 변하니까 욕해봤자 소용 없어." 비난같지만 사실은 굴복이다.
한국인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강박이 심하고 타인 통제 욕구도 심한데 자기 주장을 똑바로 할 용기는 부족하다. 그 결과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1. 주장을 자기 명의로 하지 않고 남의 입을 빌어 하거나 정당성 근거를 남에게서 끌어 온다.
2. 자신의 진짜 생각 대신 전혀 다른 핑계를 댄다.
사람들이 눈치 보는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
1. 눈치 보기는 약자임을 선언하는 행위로 약자에 대한 혐오/무시를 자극함.
2. 타인의 불안을 목격하며 자기 불안감이 덩달아 증폭되는 불쾌감(1과 통할 수 있음).
3. 눈치 보기도 기만과 조종의 일종이기 때문에 정직하지 않다는 느낌을 줌.
남의 의견이나 행동이 마음에 안 들 수는 있다.
그런데 남의 존재 자체를 견딜 수 없다는 느낌이 들면 거기가 넘어서는 안 될 과몰입의 경계이다. 나와 다른 남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건 네 생각이고 내 생각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게 가장 강력하다.
한국 중장년층 이상이 '딸이 좋다'고 말할 때, 그것은 대개 딸의 '기능'이 좋다는 것이지 딸의 '존재'가 좋다는 것이 아니다. 기능은 존재와 달리 대체 가능하다. 남들에게 딸 자랑하기 바쁜 부모가 막상 딸에게는 함부로 하는 이유도, 딸의 기능만 좋을 뿐 애정은 없어 잘해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근래 딸 선호의 본질은 딸의 공감 능력 착취. 자신은 해주지 않던 절대적 공감을 요구하는,이른바 공감 거래의 내로남불이다.
사회에서 공감은 권력 구도에 따라 일방적으로 흐른다. 약자는 강자를 이해해야 생존이 가능하므로 강자에 대한 공감력을 반강제로 키우게 되지만 강자는 그럴 필요가 없다.
집단주의 문화가 오히려 가족주의를 해체하게 된 역설이랄까. 미국의 개인주의 문화는 거꾸로 가족 구성 욕구를 더 강하게 자극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개인적 경계를 허물고 소통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희귀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인의 인생에서는 대개 타인이 과잉 상태이다.
사람은 인생 실전 경험이 모자랄수록 말도 안 되는 완벽주의/결벽증적 기준을 내세운다. 무조건 높은 기준으로 상대방에게 호통만 치는 이런 접근은 나이만 먹은 기성세대가 손쉽게 젊은이들을 갈굴 때 쓰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현실적인 척 하지만 실제로는 본인이야말로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그리고 그들은 열네살 열다섯살때부터 자기가 알아서 컴퓨터 뜯고 조립하고 그걸로 알바하고 영어도 마스터하고 심심하면 해킹도 하고 이것저것 기계만지느라 밤새고 그런 이들임. 그냥 기계가 너무 좋아서 미쳐 있으며 기계 마스터 기계의 지배자 기계의 신이 되고자 하는 미친놈들이 님들의 경쟁자다
나르시시스트를 많이 도와줄수록 더 위험해진다.
나르시시스트의 세계관 속에서 자신을 도와준 사람은 고마운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을 아는 사람, 자신을 빚쟁이로 만드는 사람, 자신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사람, 자신의 흑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은혜가 원수로 돌아온다.
여자들 무조건 이공계가라 플로우가 다시 도는데ㅋㅋㅋ 에휴 싶다가도 걔들이 참 이공계를 너무 모른다 싶은 구석이 있어. 공돌이야말로 그 분야에 좋아 미쳐서 밤낮없이 기계 만지고 컴퓨터 만지고 아예 청소년기부터 거기 인생 건 놈들이 포진한 리그인데 억지로 배운 애들이 그놈들을 어케 이기냐.
나르시시스트의 위험성 중 하나는 자신과 별다른 갈등이 없는 사람에게도 멋대로 악감정을 품는다는 데 있다. 타인의 관심을 마약처럼 공급받아야 하는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관심을 주지 않거나, 자신의 관심을 감사히 여기지 않거나, 자신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을 증오한다.
서울 한복판에 왜 남산이 있느냐고 진지하게 분노하는 사람은 없다. 그냥 자연 현상이니까. 불변의 대상이란 게 그런 것이다. 내가 적응해야 할 대상. 감히 비판이나 판단의 대상으로 삼지도 못하는 대상. 영원한 상수. 비난은 오로지 내가 조종할 수 있겠다 싶은 만만한 대상에 집중된다.
근래 딸 선호의 본질은 딸의 공감 능력 착취. 자신은 해주지 않던 절대적 공감을 요구하는,이른바 공감 거래의 내로남불이다.
사회에서 공감은 권력 구도에 따라 일방적으로 흐른다. 약자는 강자를 이해해야 생존이 가능하므로 강자에 대한 공감력을 반강제로 키우게 되지만 강자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난 애초에 딸 선호가 퍼진 이유부터 괘씸함.
아들은 엄마 안챙기고 이벤트나 선물도 기대못하고 대학가면 서먹해지고 결혼하면 지 아내 편들고... 요즘읒 며느리한테 시짜짓도 못하게 됐고...
근데 친구딸 보니 감정 받아줘 엄마 다 챙겨줘 병원 데려가줘 '효도' 다해줘
이래서 낳고싶어진 거잖아^^
겉으로 드러나는 나르시시스트의 제1 특징이 '공감 능력 없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는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기 때문에 별로 좋은 지표가 아니다.
나르시시즘적 행동의 가장 큰 특징은 타인 조종, 즉 정치질이며 이를 위한 세부 전술로는 음해, 협박, 자해공갈, 동정심 유발 등이 있다.
가장 흔한 양태는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숭배 대상을 골라 그 사람 중심의 세계관을 장착하는 것. 개인적으로 '2인자 나르시시즘'이라고 부르는데 비대한 자아상을 직접 유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손쉽게 인스턴트로 유사 자기애, 소속감, 특권의식, 공격 욕구를 모두 채울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의 비위를 거스르면 위험하다는 생각은흔히 많이들 한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나르시시스트를 도와주는 일이다.
이는 스스로를 나르시시스트의 최우선 먹잇감, 차후에 사용될 최우선 희생양 리스트에 올릴 뿐 아니라 나르시시스트의 깊은 증오를 사는 일이기도 하다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오하는 사람:
- 자신의 진심과 의도를 꿰뚫어보는 사람
- 자신에게 관심 없는 사람
- 자신의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
- 자신과 선을 긋고 자신에게 영향받지 않는 사람
- 자신을 비판하거나 행동 결과에 책임을 요구하는 사람
- 자신의 실체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사람
1: "우리 애아빠가 화가 많이 났어요" - 내가 화났다는 뜻이다.
2: "유학 가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네가 가족끼리 보듬고 사는 것의 중요성을 모른다는 거지" - 유학 가는 게 나쁘다는 뜻 맞다.
사실 오로지 상대방 조종이 목적일 때는 정정당당한 논쟁 따위는 불필요하며 비효율적이다.
부모가 자식을 통해 얻는 이익은 보통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부모가 얻는 이익은 자식이 부모에게 얻는 양육 기간의 물질 서포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익이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가 된다는 것은 신분 증명과 존재적 가치 인정 면에서 다른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승격을 의미한다.
공감이 지능 문제라는 말도 비슷한 맥락에서 유행하는 것 같은데 왜인지 이해는 가지만, 이는 생각보다 도움이 안 되는 부정확한 분석이고 정신승리.
무례한 이들은 대개 무례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며, 이는 그들이 무례하게 구는 대상보다 사회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조건 뿐 아니라 아니라 심지어 내면의 사고방식까지도 사회 통념 및 주류 의견에 동기화되는 이유. 사회적 압력에 못 이겨 납득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납득하거나 하는 척 하는 경우는 보기보다 많으며, 이는 외로움(=무리에서 파문되었다는 공포)을 피하려는 기제.
나르시시스트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독립성과 개별성을 혐오하기 때문에 자신과 상관없는 주체성을 가진 사람을 빌런으로 취급한다. 물론 이를 대놓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늘 다른 이유를 댄다.
'왜 안 만나줘'를 '돈만 밝히는 x'에 대한 비난으로 바꾸는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이처럼 한국에는 보이는대로의 주장이 다가 아닌 경우가 많다. 자기 주장을 솔직하게 하는 게 아니라 남이 그럴싸하게 봐줄 만한 것으로 대체해서 내놓는 경우가 부지기수.
자기 입맛에 채식이 싫고 육식이 좋으면 페이크 뉴스를 동원해서라도 '육식이 더 친환경적'이라고 떠들어야 하는 것.
자기에게 자신이 없어서 '남편'이 화났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고,
'유학이 나쁘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할 자신이 없어서 유학 가는 사람을 은근 슬쩍 가족의 배신자로 바꿔치기한 후 '가족 배신이 나쁘다'라는, 훨씬 더 무난해 보이는 명제를 주장하는 것.
상대를 굴복시킬 수만 있으면 되므로.
한국인들이 괴로워하는 문제 대부분이 관계 과잉 때문이지 관계 부족 때문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가족 구성 욕구도 떨어진다. 다만 관계의 양적 과잉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모든 관계의 삭제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퀄리티 없는 양적 과잉 문제는 본질적으로 오히려 결핍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도 요즘 저 생각을 정말 많이 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의식주 말고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 이 하나 필요하다는 거임
김씨표류기도 그렇고... 영화에서 많이 말하고 있는 게 이거 같다고 생각함
나를 발견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
이 하나만 있어도 세상 살기 괜찮은 것 같음
가족 간에는 필수적 경계마저 자주 침해되고 사회에서는 유사 가족관계가 재현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래서 전통적으로 한국 가장들은 가정을 외면한채 오로지 밖에서만 맺는 브로맨스만으로도 사회적 욕구를 채우며 살아올 수 있었다. 한국은 퀄리티와 상관 없이 양적으로는 관계 과잉 사회.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들은 눈치가 없거나 눈치를 아예 안 보는 사람도 좋아하지 않는다(특히 한국에서는). 따라서 눈치 보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말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눈치 보는 게 티가 나는 사람'을 싫어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눈치 없는데 눈치 보는' 게 최악의 캐릭터가 되는 이유.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가 모두 가입 시에 이용약관과 조건에 동의를 받는다. 그걸 정독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속에 설마 장기매매나 신체포기에 대한 동의 따위가 들어있지는 않을 거라는, 이 사회가 설마 그 정도로 나에게 착취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최소한의 믿음이 있는 것이다.
정신력과 시간은 무한 자원이 아니다. 이를 낭비할 필요 없이 최소한의 선택만으로도 자신에게 안전하고 유리한 환경이 제공된다면 사회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짜여졌다는 증거다. 반대로 꽝이 가득한 수많은 옵션 속에서 더 많은 정신력과 시간을 소모해야 한다면 이는 내가 착취 대상이라는 증거다.
그 뿐 아니라 심지어 두 가지가 서로 반비례하거나 상충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의외로 과도한 생각으로 행동을 대체하거나 행동 결핍을 보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또한 지나친 '심각함'이 회의주의나 비관론으로 이어져 행동에 대한 동기를 없애고 에너지를 박탈하기도 한다.
'원래 그런 사람'
'원래 그런 시대'
이런 세계관에서 피해자는 어떤 존재인가?
독재정권, 노동착취, 전쟁 피해자에게도 '원래 그런 시대'를 운운하는가? 용납할 수 없는 일, 꼭 고쳐야 할 일에 대해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 해결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나 가능한 말이다.
누군가를 지나치게 숭배하고 동일시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다. 숭배 대상을 부도덕한 놈으로 잘못 골랐다거나 숭배 방식이 잘못됐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숭배 자체가 문제이며 이건 이데올로기나 도덕 따위와도 무관하다.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는 흐릿한 정신적 경계가 원인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정치질 전술에서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태도의 비일관성이다. 대개 나르시시스트는 처음에는 과도하게 친절하거나 착한 태도를 연기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폭력적인 태도로 돌변한다. 또한 관객으로 삼으려는 이들에게는 좋은 사람처럼 굴면서 특정인들 앞에서만 사악함을 드러낸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대개 집에서는 폭군, 밖에서는 호인/호구인 경우가 많다. 집 안팎에서 모두 폭군인 스타일(트럼프 유형)은 사회적 지위가 받쳐줘야 하기 때문에 다수가 되기 힘들다. 나르시시스트들의 근본 세계관은 거의 동일하지만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표현형은 크게 달라진다.
자신이 주장하는 가치관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자신이 타인의 영향을 너무 크게 받기 때문에 본인이 괴로워서 여론을 통제하는 데 집착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사람은 상대가 소수일 때는 호통을 치다가도 대세가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영합한다.
더 무서운 것은 본인의 트리거 포인트가 개인 특수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그런 부모가 통제광 성향까지 발휘할 경우, 그 가정에는 보편적 도덕률과 무관한 그 가정만의 이상하고 무의미한 로컬 규범이 많아지게 된다. 아이들은 그저 생존을 위해 이를 준수해야 한다.
무서운 부모 특 : 어느 지점이 대체 트리거포인트인지 짐작할 수가 없어서(또는 일반적 인간과는 초월적으로??달라서) 나는 그냥 보통의 말을 했을 뿐인데 갑자기 히스테릭해짐
저의 경우에는 아는 언니가 할머니 장례식갔다네ㅜㅜ.. 슬프겠다... 했는데 갑자기 눈빛이 돌변하더니
사랑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commitment에 해당되는 얘기.
그래서 진정성에는 순간적 '진심' 여부보다 장기적 '책임' 지분이 더 높다. 흔히 마음이 진심이냐 아니냐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지만 진심 자체는 지속성과 무관하다. 세상의 비극은 계획된 기만보다 순간 뿐인 진심이 원인인 경우가 더 많다.
"사랑은 감정이기도 하지만 약속과 선택"
ㅇㄱㄹㅇ
인간의 본능과 감정은 생각보다 제멋대로임 충실한 애인이 있어도 다른 사람한테 끌리게 되어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에 대해 신의를 지키고 싶고 이 사람을 내 삶에서 계속 두고 싶은 것이... 감정을 넘어서는 감정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의견의 불일치와 갈등 대치 상태를 유달리 못 견디는 성향은 의외로 주관 없는 변덕과 변절에 취약하다. 처음에는 남에게 호통을 치다가도 도저히 남이 맞춰주지 않거나 주류 의견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본인이 생각을 바꿔 싱크로 상태를 달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존엄한 존재인 본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천민들에게나 적용될 규칙을 들이대는 '못배워먹은/무식한/세상 물정 모르는/눈치 없는' 존재로 몰아부치는 것이다.
...핵심은 나르시시스트 본인은 어떻게든 평가 대상에서 벗어나고, 오직 타인만을 규칙의 적용 대상인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피로와 번아웃 뿐 아니라 사실상 자격이 필요치 않은 많은 일에 자격을 찾아대는 자격강박증은 한국 문화의 강력한 특징 중 하나.
무언가를 '그냥' 하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행동력과 주체성이 약해진다. 무언가를 해도 된다는 외부 허락의 징조나 신호를 무한히 기다리는 망부석 생산 문화.
제가 그 정신과 의사입니다. 불러주셔서 감사해요. 견디고 버티다가 지쳐버린 분들이 “제가 서울대를 갔나요,사업에 성공했나요,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라고 자책하시는 모습에 ‘이건 아니다’싶어 책을 냈던 것이 4년이 되어갑니다. 피로에도 자격이 필요한 대한민국에서, 안녕들 하신지요.
상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지원하는 사람은 '네 주제에 감히'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이공계 여성을 지원하는 데 진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이공계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천재인 줄 아느냐 넌 절대 못이긴다'면서 겁을 주고 윽박지를 가능성은 솔방울이 수류탄 될 가능성과 같다.
주체적 판단력이 자기확신 및 고집과 비례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반비례하는 경우가 더 많다. 타인의 권위에 자기 판단력을 외주한 경우가 자기확신 및 고집이 더 강하다. 왜냐하면 사고를 통한 판단에는 유연성이 있지만 종교적 숭배에는 유연성이 없기 때문이다.
주체적 삶을 사는 방법은 근육을 키우는 원리와 같다. 하루 하루를 주체적으로 채워나가야 한다. 그래야 성장하고 실제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회적 영역도 넓어진다. 주체성을 계속 양보하다가 나중에 한 방에 이자까지 쳐서 돌려받는 방법 같은 것은 없다. 현실 인생은 쇼생크 탈출이 아니다.
보자보자하니까 생각보다 훨씬 더 나쁜 어른이네.
'이 역동적인 시기에 막연하게..별 준비도 없이'
이런 표현이야말로 막연하고 구체성이 떨어지는 전형적인 비전문가 알못의 표현. 구체적 맥락 없이 세상 무엇에 갖다 붙여도 될 법한 말은 주로 점쟁이, 사기꾼들이나 쓰는 접근법이다.
지금 구글이나 애플에서 썰려 나가는 사람들은 일급 전문가들이에요. 평생 동안 해 온 일이니 어떻게든 활로를 찾겠죠. 물론 그러는 동안 새로운 직업이 생길 수 있고. 하지만 이 역동적인 시기에 막연한 약속을 하고 별 준비도 없는 사람들을 그 동네로 보내는 건 완전히 다르단 말입니다.
부모의 나르시시즘은 자식과의 관계를 필히 근친상간적으로 만든다.
한국은 부모라는 위치를 신성시해 부모의 나르시시즘을 문화적으로, 제도적으로 보호하며 정당화해준다. 당연히 근친상간적 부모-자식 관계가 매우 많을 수밖에 없다. 욕망이 사회적 허용 방향을 따라 흐르는 것은 자연 현상이므로.
내가 본 가장 이상했던 사람은..
며느리 될 사람이 웨딩드레스 고르고 다니는 것을 보니
본인도 드레스 입어보고 싶으시다고 (결혼식을 안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안 될 거 없잖아요? 지금이라도 드레스 입고 사진 찍으시면 되죠 ㅎ 했는데..
드레스 입고 ���들하고 사진 찍고 싶으시다고...
어떤 것에 대해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실질적인 행동 없이도 무언가를 했다는 착각이 든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나의 정신적 고민 자체가 세상에 유의미한 행동이 될 수는 없다. 정당성 입증 욕구가 지나친 사회에서는 실질적 행동에 비해 고민의 총량만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남이 돈을 어디에 얼마나 쓰는지 또는 쓰지 않는지는 그의 자유인 동시에 결과도 그에게 귀속된다. 검소함은 검소한 사람의 자산을 불려줄 뿐 구경꾼들에겐 이득될 것이 없다.
따라서 남의 검소함에 흥분하고 기뻐하는 이들은 수상한 사람들이다. 네 것도 내 것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그럴 이유가 없다.
자기 머릿속에서 낭만화한 이상적 공대생 남주를 기준으로 자아의탁해서 현실 속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 같은데, 세상 수준이 생각보다 그렇게 높지 않다. 이런 트윗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존재하지도 않는 걸 기준으로 현실을 후려칠수록 본인이 고양되는 걸로 착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반대다.
한국인 특유의 불안 회피성 정답 집착 때문에 그 '하나'부터 '열'까지가 자의적으로 연결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식당 종업원에게 잘해주면 훌륭한 사람', '동물 아끼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없음', '젓가락질 잘 배운 사람만 상대해도 중간 이상' 따위의 신념은 미신 숭배와 다를 바가 없다.
한국 진보 사상: 아저씨들의 낡은 차별주의는 못본척하거나 돌려돌려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 대다나다 진짜. 진보 할재들은 비판 제외 대상이라고 대놓고 선언하네.
못본척 넘어가주니까 '공식성명으로 나오고 혐오선동에 휩쓸려 막말하는 것까지 용납'되는 게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막아?
위선도 선이며, (위)악보다는 낫다는 말을 자주 보는데 이는 위선의 일부 유형에 한한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어느 정도의 언행 불일치라든가, 미약한 실천력이라든가, 의도치 않은 불균형한 문제 인식 능력 등은 정직한 위선 축에 들며 위악보다 나은 것은 이런 종류이다.
사실 나르시시즘은 별로 특별한 게 아니다.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위계 짓는 세계관이라 누구든 스펙트럼 수준으로 가진다. 그러나 사회가 정체성을 이유로 대접을 다르게 하면 우대받는 쪽은 이것을 정당화하게 된다.
의학적 질병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건 세계관이지 질병이 아니다.
오늘 다큐 인터뷰 중간에 그 미국 기자님이 궁금해서 그런다면서 심리학자의 관점에서 “한국의 빈번한 남성들의 여성대상 성범죄가 혹시 Narcissist 질병과 상관있느냐“고 물으시더라
Narcissist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가 주변 자원에 대한 높은수준의 착취라고 말씀드림.
한국인들은 수직 위계와 역할 고정관념이 강한 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도구적 사고'의 위험성에 다소 둔감하다. 사람이든 사상이든 가치관이든 도구적인 시선으로 본다는 것은 착취 중이라는 뜻이다. 이용하려는 명분이 겉으로 그럴싸해 보이거나, 당장의 손해가 크지 않다고 괜찮은 게 아니다.
젊은 시절의 방탕한 라이프스타일을 늙어서까지 버리지 못해 건강을 망쳐놓고 그 핑계를 '자식 때문'이라고 하는 교활한 늙은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젊은이들은 죄책감 가스라이팅에 세뇌당하다가 자신이 그 나이가 될 때까지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기가 힘들다.
자신의 의견을 가지는 것,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에는 특별한 자격 조건이 필요하지 않으며, 배워야 할 선수 과목이 있는 것도 아니고, 통과해야 할 예선전도 없다.
외부로부터 허락의 신호탄을 기다리고 있다면 인생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날 것이다.
나르시시스트 중에는 사과를 절대 안하는 경우도 많지만 의외로 재빠른 사과를 통해 급성 과거 세탁을 꾀하는 경우도 많다. 사과 여부는 생각보다 중요치 않다. 순간의 진심은 연기하면 그만이다.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집착은 여러모로 좋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말하는 착한/윤리적인/도덕적인/옳은 사람의 원형=에코이스트
에코이스트의 특징은 자아 경계가 무너져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이 점은 나르시시스트와 같은데 방향이 반대.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을 자신의 수족으로 보고 에코이스트는 자신을 타인의 수족으로 만든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사회적 인식 중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개인의 과도한 나르시시즘은 비정상으로 분류되지만 시스템화된 나르시시즘은 정상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성씨, 재산의 장자 중심 상속을 통해 유지되는 가부장제는 남성의 나르시시즘이 제도화된 사례이다. 다른 종류의 차별 역시 마찬가지.
"Familiarity breeds contempt."
익숙함 또는 친밀감은 경멸을 낳는다는 뜻의 속담.
너무 가까워지면 단점이 잘 보이고 신비감은 없어진다. 또는 장점은 당연하게 여겨지고 기본 예의 및 존중은 망각하게 된다.
책임 경계까지 침범하는 친밀함은 생각보다 호감의 산물이 아니며 호감을 낳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과거의 나쁜 기억이 만든 멘탈 지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이 서로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근본 원인 색출은 결과적 문제 해결과 일치하지 않는다. 원인은 남 탓을 하더라도 내 몸은 내가 일으켜야 한다는 뜻이다.
젊은이들의 특징 중 하나가 개소리를 참아주는 역치가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과잉 적응 기제로 깎이거나 타락한 경험이 적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모든 경험과 기억이 유용한 지식이나 지혜가 되지는 않는다. 또한 모든 경험은 새로운 배움에는 어느 정도 방해가 된다.
타인과 외부 상황에 대한 이해 강박이 강해지면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하게 된다. 특히 한국에서는 외부에 대한 수용 능력을 곧 적응력으로 평가하고 나아가 이를 윤리적 태도로까지 연결시키는데, 외부에 대한 과적응이 목표가 된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잃어버리고 리액션 머신이 될 뿐이다.
남의 의견이나 행동이 마음에 안 들 수는 있다.
그런데 남의 존재 자체를 견딜 수 없다는 느낌이 들면 거기가 넘어서는 안 될 과몰입의 경계이다. 나와 다른 남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건 네 생각이고 내 생각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게 가장 강력하다.
밖에서 호인/호구 노릇을 하는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심지어 성인군자 수준의 평판을 유지하기도 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는 타인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이 전부다. 가족에 대한 친절은 평판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무쓸모이며, 투자 없이도 유지되는 관계는 소홀할수록/착취할수록 이익으로 여겨진다.
공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게 만들어 사회적 평판에 분명한 영향을 끼치거나 법적 효력이 있는 자백을 유도하는 게 아니라면 가해자의 사과는 무의미하다. 가해자가 해야 할 것은 대가를 치르는 것이지, 감히 피해자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에게 그런 강력한 내러티브 통제권을 주면 안 된다.
그렇다면 합의된 성관계와 성폭력의 명확한 구분도 10년 전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런 사람의 준거집단 내에서는. 그리고 그것이 왜 하필 지난 '10년' 중 변화를 겪었는지는 페미니즘 리부트에 답이 있을 것이다.
사회적 상식이란 생각보다 허상이며 머릿수와 또래 압력으로 결정된다.
당시엔 불법촬영물과 포르노의 명확한 구분은 없었고 당시 미성년자였음 더더욱 구분이 어려웠겠죠? 그래서 나중에 해당 장면은 불법촬영물을 참고해서 문제가 된단 사실을 알고 삭제했는데 그거 갖고 또 너는 누가 저장해서 이렇게 될줄 몰랐냐고 하면은 그냥 트집이죠... 막말로 님은 당시에 포르노
인간은 순응주의적 동물이며 자신이 속한 시간, 공간, 집단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이런 순응주의적 면모는 이성적 판단력을 자부하는 인간의 비루한 한계를 드러낸다.
시대적 순응주의를 잘못에 대한 면죄부로 쓰려면 그 한계와 새 시대의 앞서나감을 먼저 인정해야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강간문화가 인터넷에 지금보다 더 만연해서
나는 2010년대 초반에 이미 페미니스트였는데도
불법촬영물에 대해 명확한 생각이랄게없었음. 왜냐? 그냥 주변에 너무 많음. 실제 피해자가 있고 착취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음에도. 그걸 보는 사람들에 대해 문제적으로 생각하진 않았음
'남'들이 말하는 어떤 자격 조건을 갖추고 무언가를 시도하려면 평생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 그 조건은 의도적인 방해물이라, 애초부터 충족이 불가능하거나 충족 여부를 측정할 수 없는 속성으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어쩌다 충족을 하더라도, 골 포스트가 옮겨져 또 다른 조건이 추가될 수밖에 없다.
2인자 나르시시즘에는 여러가지 베네핏이 있다. 일단 나보다 훨씬 잘난 사람 중 숭배 대상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옳음을 증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이미 증명됐다고 여겨지는 타인에 묻어갈 수 있어 편하다. 명품 브랜드 가치로 자신을 설명하려는 명품 소비자와 비슷한 심리.
나르시시즘은 자기 외부의 세상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 나르시시스트일지라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시간(그에 따른 죽음)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소멸 이후 세상 역시 용납하지 못한다.
자신이 영생하거나, 세상이 자신과 함께 멸망하거나 둘 중 하나를 원한다.
천재 영화 감독은 예술성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좀 괴팍하니 범죄적 ���향도 이해해줘야 한다거나, 남자는 생활 면에서 어리숙하니까 더 많은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 등은 모두 그렇게 사회적 우위에 있는 존재들에게 무능력/장애 프레임을 선택적으로, 편의적으로 적용하는 사례들이다.
미국식 개인주의+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제1세계 사회에서 '개인의 동의'란 거의 모든 것을 승인하거나 기각할 수 있는 최상위 논리가 된다. 동의 없이는 아무리 좋은 것이어도 상대에게 마음대로 줄 수 없지만, 동의만 한다면 아무리 심각해 보여도 상대를 무제한 털어가는 것도 가능하다.
무비판 동기화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실 더 문제는 자의식만 웃자라 '나는 주관이 뚜렷한 인간'이라는 자기 선언만을 믿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어디에서 왔는지 점검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적 세뇌를 자발적 선택으로 해석하는 것은 주체성이 질식 직전의 상태라는 징후.
<은교>는 젊음과 늙음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고 '주장'하는 작가의 포장에 한국 평론가와 작가와 대중이 모두 넘어간 사례. 가장 유명한 대사인 '젊음은 너희가 잘해서 받은 상이 아니'라는 말은 그 비논리성이 얼척 없는 수준이다. 잘해서 받는 상이 아니니까 본인도 이미 받지 않았는가.
이후에 “은교는 단순히 젊은 여성이 아니라, 영원히 경배하고 싶은 불멸의 가치”라고 술회했던 것을 생각하면 박범신 작가는 아마도 은교가 왜 여성혐오적인지 영원히 깨닫지 못할 것… 뭐가 왜곡되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긴 게 아니라 바로 그 소녀가 불멸의 가치인 게 문제라니깐여😖
제정신을 지키려면 내 의견을 관철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작은 거라도 동의하지 않으면 안 한다고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하다 못해 날씨나 주말에 본 영화를 얘기하는 스몰 토크 자리라 해도 괜히 분위기 맞추려고 남의 의견에 찬성하는 척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자신을 해치는 습관이다.
한국인의 환상과 달리 '부모'의 인격은 개별 자연인으로서의 인격을 넘어서지 못하며, 부모가 자식을 늘 한 팀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다.
자기혐오와 부정적 에너지를 자식에 투사하는 것으로 해결하는 부모는 흔히 사회/타인의 편에서 자식을 공격하며 성별은 그런 자식을 선정하는 흔한 기준 중 하나.
슬픈 사실이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이건 부모라는 정체성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됨. 사회적 권력구도에 이미 순응한 부모가 자식 문제라고 그걸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순진한 기대.
상당수의 한국 부모에게 딸을 위해 싸우라는 것은 사회와 맞서고 지는 팀에 베팅하라는 부담스러운 주문이다.